2008. 1. 31. 10:44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1975년>


▲ 일러스트 잠산



하마터면 이 시는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유성처럼 사라질 뻔했다. 송수권(68) 시인이 서대문 화성여관 숙소에서 이 작품을 백지에 써서 응모를 했는데, 잡지사 기자가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의 원고"라며 휴지통에 버렸다. 당시 편집 주간이었던 이어령씨가 휴지통에 있던 것을 발견해 1975년 '문학사상' 지면에 시인의 데뷔작으로 발표했다. 이 일화로 '휴지통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입소문'을 타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고, 발표 이후에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를 애타게 호명하고 있지만, 이 시는 남동생의 죽음에 바치는 비가(悲歌)였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비어 있는 맞은편을 망연히 바라보았을 그 시방(十方)의 비통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 죽은 동생의 환생에 대한 강한 희원을 드러낸다.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등의 역동적인 문장은 적극적인 환생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산문(山門)은 속계(俗界)와 승계(僧界)의 경계이고, 이승과 명부(冥府)가 갈라지는 경계인 바, 산문에 기대어 생사의 유전(流轉)을 목도하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사의 감옥에 갇혀 살아도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생을 살아 이처럼 마음을 절절하게 울리는 노래를 낳았다.

송수권 시인은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어오면서 황토와 대(竹)와 뻘의 정신에 천착해 왔다. 그는 '곡즉전(曲卽全·구부러짐으로써 온전할 수 있다)'을 으뜸으로 받든다. "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추억이 있고, 들숨이 있지요. 시간이 있고, 희망이 있고, 공간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는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애지고 막막'하게 하지만 남도 특유의 가락과 토속어의 사용으로 슬픔과 한을 훌쩍 넘어서는 진경을 보여준다.

입력 : 2008.01.3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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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31. 10:43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1948년>


▲ 일러스트=권신아



평북 정주하면 소월이 있고 백석(白石·1912~1995)이 있다. 1988년의 월북시인 해금 조치 이후 '백석 붐'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백석 시인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현대시에서 드물었던 북방 정서와 언어의 한 정점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소장하고 있다가 1948년에 발표했다. 해방 공간에 발표된 백석의 마지막 작품이다.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 집에서'라는 제목의 뜻에 주목해볼 때 친구에게 편지 형식으로 보낸 고백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래서일까. 소리 내어 읽노라면 그가 나직이 말을 건네는 듯 '가슴이 꽉 메여 오'고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이곤 한다.

'나'라는 맨 얼굴의 시어나 '-이며' '-해서' '-인데'와 같은 나열 혹은 연결어미나 '것이었다'라는 종결어미 등의 반복이 내뿜고 있는 독특한 산문적 리듬이야말로 이 시의 백미다.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한다는 직유며,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직설이며,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역설 등 사무치지 않는 구절이 없다.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기까지의 의연한 회복 과정이 유장한 리듬과 어우러져 한 편의 인생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1942년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즈오는 기자와 교사생활을 작파하고 만주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히 살고 있던 그를 찾아간다. 그는 가즈오에게 '나 취했노라'라는 시를 헌정했다. 20년 후 가즈오는 "파를 드리운 백석./ 백이라는 성에, 석이라고 불리는 이름의 시인./ 나도 쉰세살이 되어서 파를 드리워 보았네."('파')라는 시를 그에게 헌정했다. 파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을 그를 생각한다. 쌀랑쌀랑 소리를 내며 싸락눈을 맞는다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갈매나무를 생각한다.

입력 : 2008.01.3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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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31. 10:40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일러스트=잠산



이문재(49) 시인의 시들은 치열하고 내부가 끓고 있다. 그의 시들은 결사(結社)를 한다. 주로 도시와 문명의 급소를 공격해 단숨에 제압한다. 시 '푸른 곰팡이'가 실려 있는 두 번째 시집 '산책시편'(1993)은 시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도시적 공간의 무서운(파시스트적인) 속도에 대항해 '게으르고 어슬렁거리고 해찰하는' 8편의 산책시(散策詩) 연작을 발표한다. 그는 '아파트단지가/ 웨하스처럼, 아니 컴퓨터칩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는 곳을 느릿느릿 걷는다. 그는 '도시는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느림보는/ 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 도시에서 당하고 말지요/ 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마지막 느림보-산책시 3')라고 썼다.

시 '푸른 곰팡이'에서도 느림을 예찬한다. 사랑도 산책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이 산책 같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랑은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이지만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을 살면서 사랑은 무르익고 완성된다는 뜻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 보라. 아무리 격렬한 사랑에 휩싸인 사람일지라도 백지를 앞에 두면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러나 머뭇거림이 편지의 미덕. 지우고, 생각을 구겨버리고, 파지(破紙)를 내는 시간에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나흘을 또 기다려 보라. 나의 편지가 사랑하는 이의 안뜰과 마루와 품에 전달되기까지의 그 시간을 마른 목으로 가슴 설레며 살아보라. 푸른 강이 흘러가는 그 기다림의 거리를 살아보라. 그러는 동안 사랑은 푸른 강의 수심처럼 깊어질 것이다.

요즘 이문재 시인은 따뜻한 체온의 '손'을 주목하고 있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내미는 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근년에 발표한 시 '손은 손을 찾는다'에서 '손이 하는 일은/ 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 빈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의 시는 도시와 문명에 단호하게 맞서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괸, 그리워하고 연민하는 사랑의 마음이 산다.

입력 : 2008.01.29 01:00 / 수정 : 2008.01.2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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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8. 21:57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일러스트=권신아


영화 '박하사탕'에서, 돌아갈 곳 없는 설경구는 철교 위에서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러나,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빽'이 있는 사람이다. 그 '빽'이 하늘이라면 그는 천하무적으로 세상을 주유하는 사람이다. 하늘을 믿으니 이 땅에서는 깨끗한 빈손일 것이다. 하늘을 믿는데 들고 달고 품고 다닐 리 없다. 그러니 새벽빛에 스러지는 이슬이나, 저물녘 한때의 노을이나, 흘러가고 흘러가는 구름의 손짓 등속과 한패일밖에.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라며 스스로를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시 '행복')라 일컬었던, 왼쪽 얼굴로는 늘 울고 있던 시인, 천상병!(1930~1993) '귀천'은 1970년 발표 당시에는 '주일(主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그의 시는 생(生)의 바닥을 쳐본 사람들이 갖는 순도 높은 미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의 언어는 힘주지 않고, 장식하지 않고, 다듬지 않는다. '단순성으로 하여 더 성숙한 시'라 했던가. 이 시에서도 그는 인생이니 삶이니 사랑이니 죽음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도 무욕이니 초월이니 달관이니 관조니 하는 말로 설명하지 말자. 이슬이랑 노을이랑 구름이랑 손잡고 가는 잠깐 동안의 소풍이 아름답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 가볍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니 소풍처럼 살다갈 뿐.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전도유망한 젊은이였으나 '동백림 사건'(1967)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 후유증은 음주벽과 영양실조로 나타났으며 급기야 행려병자로 쓰러져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그가 죽었다고 판단한 친지들에 의해 유고시집 '새'(1968)가 발간되었는데, 그 후로도 천진난만하게 25년을 더 살다 갔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이라고 노래했던 그는 분명 새가 되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 갔으니, 자유롭고 가벼운 새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입력 : 2008.01.27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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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뒷골목인터넷세상 2008.01.30 15: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 정말 기쁩니다. 제가 나눠드린 티스토리 초대자들중 님이 가장 활발한 포스팅활동을 하고 계시는 군요 ^^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2008. 1. 28. 21:55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 일러스트=잠산



시인은 언어의 맨살을 만진다. 말과의 상면과 말의 '한 줄금 소나기'를 만나는 순간의 경이를 시인은 표현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경이가 사라지는 일은 슬픈 일이다.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혀를 대보고 생각을 만드는 이 날것의 감각에서 소위 맛이 사라지면 살맛이 가실 것이니 이 세상은 얼마나 캄캄한 절망이겠는가. 이 세상을 다시 맞는 아침에는 당신도 "아, 세상이 맛있다!"라고 말해 보라. 애초에 생(生)에는 무력감이 없으므로.

시 '삽'에는 경이가 있다. 나도 '삽'을 발음해 본다. 입술이 모시조개처럼 예쁘게 모인다. 손으로 목화를 따들이는 느낌이 있다. 시인은 이 발성의 쾌감에 희열한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들어간다.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에 작달막한 삽 한 자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여준다. 언젠가 제대로 한 번 써볼 생각으로 연일 '마른 볏짚으로' 문질러 놓아 녹슬지도 않았다. (나도 나의 아버지가 들일을 마친 해질 무렵에 마른 볏짚으로 삽날을 문지르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 저녁 풍경의 숙연함이여!)

시인은 무슨 일에 이 삽을 사용하려 하는 것일까. 당신의 사랑을 얻을 때에 한 번 뜨고, 종국에 닥칠 나의 죽음을 내 스스로 거두어들일 때 한 번 뜨겠다고 한다. 생의 한 경이를 포착한 이 시가 참 좋은 이유는 시 전반부의 발성의 쾌감이 후반부의 비장함으로 진행되는 데에 있다. 비장하지만 마구 심각하지는 않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경이다. 경이가 없다면 기다림도 없을 것이므로. (연애에 경이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의 애인들이 내일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 모두 떠나가 버리는 것처럼)

시 전문지 월간 '현대시학'의 주간을 맡고 있는 정진규(69) 시인은 산문시의 성공적인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산문시는 영혼을 한순간에 탁, 부려 놓는다. 그리하여 산문시 아닌 시들보다 오히려 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시 쓰는 일을 비유하길 세상을 배알하는 일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그는 올해로 칠순을 맞았다. 그의 시는 종심(從心)이되 어긋남이 없으니 무량무변하다.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1.26 00:17 / 수정 : 2008.01.26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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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8. 21:52

겨울 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일러스트=권신아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 있다. 새벽 교회당 구석에서, 간절히 내뻗은 자신의 두 손을 부여잡고 고개를 떨군 채였다. 소리 없이 일렁이는 가파른 등에서 겨울 바다 냄새가 났다. 지난밤 내내 뚝 끊긴 생의 절벽 앞에 서 있다 온 사람의 등이었다. 인간은 기도할 줄 아는 사람과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구분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가슴에 새를 품고 산다, 미지라는 한 마리 새를. 삶에 대한 자신의 의지 혹은 희망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리라. 그 새를 잊지 않고 간직한 사람은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미래의 새를 잃어버린 사람은 '겨울 바다' 앞에 서기도 한다. 그곳은 절망의 끝 혹은 허무의 끝일 것이다.

보고 싶던 미지의 새들은 죽어 있고 매운 바닷바람에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린, 허무라는 마음의 불(心火)로 불붙은 겨울 바다. 그 죽음의 공간에서 시인은 시간의 힘을 깨닫는다.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말도,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를 맑게 깨우치고 우리를 키우는 건 세상을 항해 '끄덕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다.

기도는 시간을 견뎌내는 데서 비롯된다.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해달라는 심혼(心魂)의 기도는, 저 차디찬 바다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인고의 물기둥'을 세우는 일이었으리라. '허무의 불'을 '인고의 물'로 버텨내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힘이고 기도의 힘이다.

김남조(80) 시인은 기도하는 시인이다. 팔순을 맞이하여 어언 60여 년의 시력(詩歷)으로 간구해온 그의 시편들은 사랑과 생명과 구원으로 충만한 기도들이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설일(雪日)')를 낭독하는, 떨리는 듯한 그러나 결기 있는. 시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입력 : 2008.01.24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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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8. 21:50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일러스트 = 잠산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은 식민지 시대를 살다 간 혁명가요, 시인이요, 수행자였다. '님의 침묵'은 1926년에 펴낸 그의 유일한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시이자 서시이다. 이 시는 님과의 이별과 이별의 슬픔을 재회(再會)로 역동적으로 바꿔놓는다. 이런 극적 구성은 불교 특유의 유심적 상상력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돌이키는 것으로써 만해는 있음과 없음, 좋음과 그렇지 못한 것,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만남과 이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아마도 만해의 시를 올연히 뛰어나게 하는 힘은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려는 마음의 편당(偏黨)과 굴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그의 수행자적 기풍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역설의 화법이 생겨났을 것이다.

만해는 시집의 맨 앞에 놓인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라고 썼다. 만해는 님을 절대적인 추앙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고, 님과 나의 관계를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해석했다. 만해는 내 안에서 님을 발견하고 완성하고자 한 실천가였다.

조선의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인데 어떻게 불 땐 방에서 편히 살겠느냐며 만해는 냉골의 거처에서 꼿꼿하게 앉아 지냈다. 해서 '저울추'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돌집(조선총독부)이 마주 보이는 쪽으로 당신의 집을 지을 수 없다며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만해는 깨달음을 얻은 후 오도송에서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그네의 수심에 잠겼던가. 한마디 소리쳐 우주를 설파하니 눈 속의 복숭아꽃 붉게 붉게 나부낀다"라고 읊었다. '눈 속에 핀 복숭아 꽃송이'가 바로 만해의 시요, 만해의 정신이었다 할 것이다.
입력 : 2008.01.24 01:19 / 수정 : 2008.01.24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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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3. 13:48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일러스트=권신아



정호승(58)시인만큼 노래가 된 시편들을 많이 가진 시인도 드물다. 안치환이 부른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비롯해 28편 이상이다. 그의 시편들이 민중 혹은 대중의 감성을 일깨우는 따뜻한 서정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뜻한 슬픔'으로 세상을 '포옹'하는 그의 시편들을 읽노라면 좋은 서정시 한 편이 우리를 얼마나 맑게 정화시키고 깊게 위로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곤 한다.

그는 별의 시인이다. 그것도 새벽 별의 시인이다. 별이란 단어를 그보다 더 많이 쓴 시인이 또 있을까. 그가 바라보는 별에는 피가 묻어 있기도 하고 새들이 날기도 한다. 그의 별은 강물 위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그 또한 별에 죽음의 편지를 쓰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별들도 어둠 없이는 바라볼 수 없으며, 밤을 통과하지 않고는 새벽 별을 맞이할 수 없다.

이 시는 '하늘에는 눈이 있다'라는 단언으로 시작한다. 눈은 '보리밭길'을 덮는 눈(雪)이기도 하고 '진리의 때'를 지키는 눈(眼)이기도 할 것이다. 눈 내린 보리밭길에 밤이 왔으니 '캄캄한 겨울'이겠다. 겨울의 캄캄하고 배고픈 밤은 길기도 길겠다. '가난의 하늘'이니 더욱 그러하겠다. 진리의 때가 늦고 용서가 거짓이 될 때, 북풍이 새벽거리에 몰아치고 새벽이 다시 밤으로 이어질 때 그 하늘은 '죽음의 하늘'이겠다. 그런데 그런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얼마나 따뜻할 것인가.

우리 생의 팔할은 두려움과 가난과 거짓으로 점철된 어둠의 시간이다. 눈물과 탄식과 비명이 떨어진 자리에 피어나는 꽃, 그것이 바로 별이 아닐까.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한('슬픔을 위하여')' 법이다. 어두운 현실에서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가장 낮은 곳에서 밝다.

눈 내리는 보리밭길에 흰 첫 별이 뜰 때부터 북풍이 지나간 새벽 거리에 푸른 마지막 별이 질 때까지 총총한 저 별들에 길을 물으며 캄캄한 겨울을 통과하리라. 그 별들의 반짝임과 온기야말로 우리를 신(神)에 혹은 시(詩)에 가까이 가게 만드는 것이리라.

입력 : 2008.01.22 00:34 / 수정 : 2008.01.22 10:34
Posted by d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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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3. 13:47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일러스트=잠산

물은 선하다. 물은 그 자체로 흐르는 모습이다. 흐르는 에너지이다. 물은 작은 샘에서 솟고, 뿌리에게 스미고, 하나의 의지로 뭉쳐 흐르고, 환희로 넘치고, 작별하듯 하늘로 증발하고, 우수가 되어 떨어져 내리고, 다시 신생의 생명으로 돌아와 이 세계를 흐른다.

우리가 태어나고 사귀고 웃고 슬프고 울고 아득히 사라질 때에도 물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계에 왔으며 우리보다 먼저 사라졌으며 우리보다 먼저 다시 태어났으니, 유한한 우리에게 물은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고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물은 불과 흙과 공기와 더불어 이 세계가 온존하는 한 온존할 것이다. 해서 물은 모든 탄생과 소멸을 완성하며, 그 자체로 소생하고 순환하는 생명이다.

이 시를 읽을 때면 '선한 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불이 어떤 부정과 대립이라면 물은 그마저도 끌어안는 어떤 관용. 물은 사랑. 자주 침묵하지만 한 번도 사랑을 잊은 적이 없는 마음 큰 이. 우리도 서로에게 물이 되어 서로의 목숨 속을 흐를 수 없을까.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없을까. 물과 같고 대지와도 같은 침묵의 큰 사랑일 수 없을까.

강은교(62) 시인이 '사랑法'이라는 시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중략)//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라고 노래했듯이.

강은교 시인은 1968년에 등단해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초기에 발표한 시들이 강한 허무 의식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녀를 '허무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녀의 시는 민중적인 서정에도 가 닿고, 사소하고 하찮은 생명들을 끌어안기도 하는 등 아주 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나는 어느 해엔가 그녀가 시의 낭송과 울림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 속 질병과 상처를 치료하는 '시 치료' 공연을 하는 것을 감명 깊게 본 적이 있다. 그때에도 지금에도 강은교 시인은 이 세계의 순례자로서 이 세계의 구원을 위해 생명수를 구해오는 바리데기의 현신이다.

입력 : 2008.01.21 00:56 / 수정 : 2008.01.2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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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3. 13:46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일러스트=권신아

시냇물 같은 목소리로 낭송했던 가수 박인희의 '목마와 숙녀'를 옮겨 적던 소녀는 이제 중년의 '여류' 시인이 되었다.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쓴 버지니아 울프는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템스강에 뛰어들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하며'라는 유서를 남긴 채. '목마와 숙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페시미즘의 미래'라는 시어가 대변하듯 6·25전쟁 이후의 황폐한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

수려한 외모로 명동 백작, 댄디 보이라 불렸던 박인환(1926~1956) 시인은 모더니즘과 조니 워커와 럭키 스트라이크를 좋아했다. 그는 이 시를 발표하고 5개월 후 세상을 떴다. 시인 이상을 추모하며 연일 계속했던 과음이 원인이었다. 이 시도 어쩐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일필휘지로 쓴 듯하다. 목마를 타던 어린 소녀가 숙녀가 되고, 목마는 숙녀를 버리고 방울 소리만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소녀는 그 방울 소리를 추억하는 늙은 여류 작가가 되고…. 냉혹하게 '가고 오는' 세월이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로 요약되는 서사다.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생명수를 달라며 요절했던 박인환의 생애와, 시냇물처럼 흘러가버린 박인희의 목소리와, 이미 죽은 그를 향해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고 쓸 수밖에 없었던 김수영의 애증을 이야기해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인 것을, 우리의 시가 조금은 감상적이고 통속적인들 어떠랴. 목마든 문학이든 인생이든 사랑의 진리든, 그 모든 것들이 떠나든 죽든,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바람에 쓰러지는 술병을 바라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모라면, 그렇게 외롭게 죽어 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라면.

입력 : 2008.01.19 00:35 / 수정 : 2008.01.19 10:54

Posted by d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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